<aside> 👉 전시 서문

두 번째 자연, 측정할 수 없는 리듬

자연으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쾌를 느끼는 때가 있다. 그 쾌는 결코 질리는 법 없이 매번 새삼스럽게 생경하다. 때로는 거대하고 웅장하게 압도하고, 때로는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미묘한 변화로 놀라움을 준다. 이렇게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자연에 단연코 분명한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매 순간 모든 것이 이전의 상태에서 이후의 상태로 미분 된 변화를 맞이한다. 이러한 진실은 철학에서 과학까지 진리를 좇는 많은 이들이 반복해서 언급해오기도 했다. 예술가 또한 오랜 기간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자연을 완벽히 흉내 내는 것에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이 그 스스로를 자연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동시에 자연에 종속된 존재로 납득하는 모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은 언제나 선망되는 영역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쉬이 즉각적 경험으로 여기곤 하는 음악은 과연 자연일까? 19세기의 음악 비평가이자 음악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그의 책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 <음 예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세밀히 기술했다. 그는 ‘개별 예술이 자연적 기초와 연결되어 있음을, 그 예술과 자연을 연결해주는 부드러운 섬유와 딱딱한 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예술과 자연의 이중적인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그중 하나는 예술이 가공되지 않은 물질적 재료를 자연으로부터 취해 이것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방식의 관계 맺기다. 다른 하나는 자연을 예술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아 자연에서 예술을 찾아내는 것이다. 한슬리크는 이에 덧붙여 ‘자연에는 측정할 수 있는 음이 들어있지만, 측정할 수 있는 음들의 정돈된 연속인 선율은 자연 속에서 전혀 발견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음과 음 사이의 조화로운 간격을 만들어 화성을 감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율과 화성은 항상 리듬과 같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자연의 리듬은 선율과 화성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저 측정할 수 없는 공기의 진동을 싣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흥미롭게도 문규철의 접근은 한슬리크가 언급한 자연과 예술의 두 가지 관계를 동시에 담고 있다. 그는 음악을 만든다기보다 움직임으로부터 소리를 알아차린다. 이때의 움직임은 빛을 관통시키는 입자부터 소리의 파동을 전달하는 매질까지를 포함한다. 그의 소리는 마치 선율과 화성을 동반하지 않는 자연의 리듬처럼, 움직임의 최소단위가 매끄럽지 않게 결합되며 복잡계를 만든다. 다시 말해, 이것은 두 번째 자연인 셈이다. 음악을 듣는 일은 그 구조를 살피는 세심한 노력이 수반되는 동시에 듣는 이의 감정 상태가 쉽게 대입되곤 한다. 그러나 그가 움직임의 요소를 구상해 만들어낸 음향에는 으레 음악을 들을 때 부여하곤 하는 통념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문규철의 작업은 인간 정신의 산물인 음악이라기에는 훨씬 근본적이고 큰 범주를 다룬다. 즉, 그의 작업은 그가 선택한 재료로 자연의 복잡계를 재구성한 창조적 환경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무려 이천여 년간의 재현 역사를 지녀온 예술이 끊임없이 도달하고자 열망했던 자연-되기에 대한 야심 찬 시도다.

문규철은 ‘소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구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청각 경험이 시각 경험과 동일 선상에서 감각된다는 공감각적 재능의 발로일까? 그러나 작가가 말한 소리와 구름 사이에는 어떠한 은유도, 상징도 없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운동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운동 자체로부터의 청각 경험이야말로 소리를 듣는 것과 구름을 보는 것 사이를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시각물은 빛으로 보이는 입자가 일정한 방향 없이 움직이며 명암을 교차시킨다. 더불어 눈에 선명한 물질이 비물질의 상태로 변모하며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전환과 닿아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총체적 환경으로 작동하며 시각적 청각 경험이 된다. 무한히 교차하는 시각과 청각의 감각지는 선율로도, 화성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리듬을 낳는다.

한편 문규철의 작업은 만들어낸 환경 그대로의 상태로 통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환경의 모체를 만든 뒤에 발생하는 우연성을 목격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출현한다. 자연의 복잡계에서 발생 가능한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듯, 그가 창안한 두 번째 자연은 움직이는 모든 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시스템 안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은 자연으로 한 걸음 도약하는 것과 같다. 굴러다니는 조약돌의 움직임을 완전하게 예측할 수 없듯이, 그 움직임으로 생겨나는 소리의 높이와 리듬을 짐작할 수 없듯이, 이 모든 우연성의 총체가 바로 꾸밈없는 자연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된다. 예술가의 선택이 선택하지 않은 결과를 포함하는 포용력을 가질 때, 우리는 이것을 자연으로 불러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기술은 인간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던가. 자연의 일원인 동시에 자연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간은 이제 무엇을 보고, 들을 수 있을까? 작가가 지금의 세계에 일시적으로 구성해 놓은 환경은 쉼 없이 운동한다. 이 운동은 때때로 고조되었다가 침강하기를 순서 없이 반복한다. 지금 이곳에서 자연에 대한 아주 순수한 열망이, 측정할 수 없는 두 번째 자연을 상상하고 있다.
X 박수지 (독립 큐레이터 / AGENCY 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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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작가노트

동시대 기술과, 기술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우리의 보고, 듣고, 감각하는 모든 방법들을 바꾸어 놓았다. 인간의 몸은 이미 기계적임을 내재화 하고 있고, 기술은 기술 자체보다는 우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몸에서 부터 확장된 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변화와 함께 다시 우리의 감각 체계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기존과 다른 감각의 질서들을 요구한다.

작업의 과정은 소리와 시각적 요소들을 작은 단위로 자르고, 작은 입자들이 제한된 환경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이자, 여기서 발생하는 무위와 불규칙성을 관찰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유의미한 운동이 되는 과정은 무질서함 속에서 유기적인 질서를 찾는 과정이고, 불규칙한 입자의 움직임이 환원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사운드 자체는 중립적이며, 또한 무용한 소리는 없다는 믿음에서 부터 출발한다.

자연을 관찰하는 과정은 무위와 선을 찾는 과정인 동시에 그 안의 작은 요소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관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서는 소리가 난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작업과 매체를 확장하는 과정은 결국 제한된 에너지와 파동의, 빛과 소리의 의미론적인 탐구와 더불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매체들의 존재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운드는 시간에 의존적이므로 비가역적이다.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상승하다, 에너지를 잃고 소멸한다. 매질을 진동시키는 사운드 자체의 특성과 외부적 힘 아래의 시스템 안에서 사운드는 생성과 소멸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무수한 자연의 돌과 구름은 잠재적 에너지를 가진 원천이자, 매개로, 반복적인 전기장치와 모터의 움직임들, 빛의 산란, 디지털 조형의 움직임을 통해 작은 입자의 운동이 만드는 소리와 빛 - 운동성은 내재화 된 소리가 가지는 생명의 가능성이자 단서가 된다.

소리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는 과정이자, 작은 입자들의 비물질적 운동이 만드는 물질 세계와 비물질적 존재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지구, 혹은 우주 먼 곳에서 물리적 한계를 넘어 공진하는 끊임없는 소리의 단서들을 상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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